1st magnolia 2023. 5. 22. 08:21

한국의 종합병원에서는 딱 1년 2개월 일했던 것이 전부여서, 것도 20년쯤 지난 일이라, 한국의 일하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뉴욕이 아닌 다른 주에서는 일해 본 경험이 없어서 다른 주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아마 다들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내가 일해본 대부분의 뉴욕의 병원은 팀 간호를 한다. 각각의 병동은 여러 팀들로 나누어져 있고, 각 팀에 담당 널스 한 명, 담당 조무사 한 명이 짝을 이뤄 일하는 시스템이다.

해더는 현재 트래벌을 하고 있는 스토니 브룩 대학병원의 응급실 조무사다. 일을 너무 잘해서 같이 팀이 되어 일을 하면 내가 굳이 이것저것 필요한 사항을 얘기해 줄 필요가 없다. 일 하는 시스템이 몸속에 로봇처럼 장착이 되어서,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해서 퇴원하거나 입원실로 갈 때까지 아주 깔끔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준다. 스토니 브룩 대학병원의 조무사들은 내가 여태껏 만나 일했던 어느 병원의 조무사 들보다도 일을 잘하는데, 그중에서도 해더의 일하는 방법은 군계일학이라 할만하다. 그렇지만 해더도 완벽하지는 않다. 그녀와 일 하는 게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니...

해더는 사람을 구별 짓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vs 싫어하는 사람. 그 분류의 기준을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사실 대단한 이유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냥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나란 법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

처음 해더와 일을 할 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해더는 알아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미리 해놓기 때문에 크게 커뮤니케이션이 필요 없었지만, 뭔가 나랑 부딪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내게 환자에 대한 어떤 얘기를 할 때도, 뭔가 화난 듯 한 말투가 있는 듯 없는 듯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드물기는 하지만 원래 말투가 퉁명스러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해더도 그런 부류인가 싶어서 너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번은 해더가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압... 쟤한테는 나한테 말하는 거랑 다르네?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음... 나를 싫어하나 보고만... 어쩔 티비... 나도 네가 싫으니 쌤쌤이다, 하면 될 일. 나도 해더에게는 대단히 사무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은 아닌 정도, 그렇지만 같이 일해도 상관없는 정도, 로 지냈다. 해더와 팀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도 했었으므로 맘에 둘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주 팀이 되기 시작했다. 일은 깔끔한데 말투나 행동이 좀 거슬렸다. 예를 들자면, 해더는 항상 헤비메탈 음악을 틀어두고 일을 했다. 가끔 나랑 앞뒤로 앉아서 일을 하는데, 그 음악이 너무 거슬렸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환자 모니터 소리가 알람을 울려대고, 전화벨 소리, call bell 소리, 응급실 공지 소리, 병원 전체 공지 등등이 울려대서 정신 사나운데, 싫어하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까지 들리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환자 방에 들어갈 때도 방 문은 꼭 닫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를 차단해야만 하고, 환자 티브이도 무음으로 바꾸고서야 환자랑 얘기를 해야 하는, 소음이 너무도 싫은 내게, 그 음악소리까지 더해진다는 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정중히 음악을 꺼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본다. 눈으로 네가 뭔데...라고 말을 한다. 보통은 어머 미안해... 하며 꺼 줄텐데, 해더는 아무 대답 없이 소리만 조금 줄인다. 아니 저 싸가지... 는 뭐지? 완전 못 배워 먹은 저 태도라니!!! 아니 음악 꺼달라고!라고 말하면 싸우겠구만... 싶어 나도 그녀가 했듯 한번 위아래로 훑어봐주고는 그냥 내 자리를 해더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그 일은 마무리 지었다.

한 번은 어떤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내게 말하는 투가 너무 거슬렸다. 무례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아니 이건 참아 줄 수가 없구나... 싶어 해더에게 다가갔다. 해더야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 왜 아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니? 했더니 똥그란 눈으로 놀라 쳐다본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라고 되묻는다. 니가 좀 전에 나한테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나는 왜 니가 그런 태도로 얘기를 해야 했는지 잘 모르겠어서, 했다. 그랬더니 나 애티튜드 같은 거 없었는데..? 라며 딱 잡아떼기 시전을 하는 모양새라니... 평소와 다른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사람이 되어 나이스 하게 말하는 해더를 보며 아... 이 아줌마 나를 우습게 봤다가 좀 놀랐구나... 하는 맘이 생긴다. 해더는 딱 봐도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을 텐데, 그래 일단 한번 경고를 주었으니 다음에는 알아서 조심해라, 하는 생각이 들어... "니가 나한테 말하는 태도가 좀 좋지는 않았다고 말해주려고. 너는 나한테 애티튜드 따윈 없었다고 말하니 일단은 나도 그렇게 받아들일게. 그런데 나는 너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걸 니가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걸로 그 일은 마무리 지었다.

그러다 또 한 번 해더와 팀이 되었다. 새 환자가 한 명 우리 팀에 배정이 되었고, 환자 인터뷰를 하며 urine sample, blood sample 모두를 collection 했다. 그리고는 환자에 대한 챠팅을 하는 중이었다. 해더가 옆에 오더니 너 혹시 환자 소변 collect 했어? 묻는다. 응 내가 소변 보냈어, 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조금 커지더니 얼굴이 벌게진다. 환자 소변 보내면서 남은 소변 안 버리고 어떻게 방에 그냥 둘 수가 있지? 격앙된 목소리로 화를 내며 나 보란 듯 환자 소변을 방에서 들고 나와 보란 듯 버리러 간다. 팔을 휙휙 휘저으며 쿵쿵 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데 아... 전에 했던 내 말발이 안 먹혔구나... 한번 더 말해줘야겠구나... 싶었다. 내가 환자 소변을 안 버린 이유가 있겠지 이것아. 그리고 설령 이유가 없었다고 해도 내가 왜 환자 소변을 아직 방에 뒀다는 이유로 너한테 그따위 말을 들어야 하냐? 내가 너보고 치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열을 받아 조용히 일 잘하고 있는 내게 와서 시비를 털고 가는 거냐고!!! 하는 맘.

당장 말하면 싸우게 될 것만 같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할 일들을 먼저 처리했다. 그리고는 30분쯤 흘렀을까. 해더에게 다가갔다.
- 해더?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이스한 목소리로 바뀌며) 할 말?
- 응. 아까 너 그 환자 urine 얘기할 때 왜 나한테 화가 났었음?
- (여전히 예쁜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
-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면, 니가 나한테 그렇게 화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를 하는 거거든~ 환자 소변이 왜 아직 방에 남아 있었는지가 너한테 문제가 됐다면,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봤어야지,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라.  
- (예쁜 목소리) 그래,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잖아~
- 아니, 그런 건 물어봤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냥 너 할 말만 하면서 니가 그것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한 거지.
- 아니야~ 환자 소변을 안 버렸길래 왜 안 버렸냐고 내가 물어본 거잖아~
- 해더? 나는 너랑 같이 일하는 거에 대해서는 불만 없어. 너 일 잘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날 대하는 건 accept 할 수가 없네. 나는 니가 나한테 말했던 그 말 자체나 그 말의 내용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니가 나랑 커뮤니케이션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거야. 내가 전에도 너한테 비슷한 말 했던 거 기억하지? 나는 니가 지금 이 일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번에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화내지 말고 이유를 먼저 물어봐주길 바래.
- ( 기분 상한 얼굴로 바뀌며 )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네. 나 그런 적 없거든?
- 오케이. 나는 이걸로 됐어. 너랑 같은 얘기를 계속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다음번에 또 그러면 그때는 매니저한테 얘기할 거야.

그렇게 또 한 번의 충돌이 있었다. 불편하지만 꼭 해야 하는 말. 한국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던 그런 종류의 충돌을 미국에선 꽤 겪은 편이다. 처음에는 그저 당하고만 있었다. 나한테 왜 저러지? 나 잘못한 거 없는 거 같은데...? 그러고는 기분 나빠하면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환자들도 성격 이상한 환자는 무척이나 드물었는데, 하물며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 저런 사람은 들어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었다. 저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란 걸 배웠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미국땅에 오니 그런 사람들 왜 많은 거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식의 성격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과의 충돌을 일으켰다. 이런 얘기를 하긴 조심스럽지만 유난한 인종이나 유난한 나라들이 있긴 하다. 그러면서 깨달은 또 하나는 <사람도 문화다>라는 것.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어디냐에 따라 개개인의 성격은 그룹으로 묶이는 특징적 모습을 보인다는 것. Melting pot 이러고 불리는 뉴욕에 있다 보니 세상 모든 인종을 다 만나본 것만 같다. 유난히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고야... 또 저쪽 애들 이구만... 하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 물론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구별을 하게 되는 나쁜 버릇이랄까 선입견이랄까... 하는 것 역시 생겨버렸다. 

어쨌든 그리해서 나는 배워야만 했다. 자기 성질머리도 그날의 기분도 그대로 직장으로 들고 와 나 같은 사람에게 풀어버리는 그따위 고약한 인간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방법을...

2006년 12월 18일. 처음 미국에서 일을 시작했던 날. 처음엔 당하고도 몰랐던 일들이 어찌 없을까. 당하고도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혼자 속으로만 삭이거나, 친구랑 뒷담화를 깐다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간다거나... 그런 식으로 만 지나쳤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You have to speak up. No one can speak up for you.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계속 어이없이 우스워질 수만은 없었다. 미국 생활이 원이어 투이어도 아니면서 평생 아무 잘못도 없이 잡아 먹히고 살 수는 없잖아!!!  버벅거리기, 얼굴 빨개지기, 조리도 없는 말에, 정작 중요한 포인트는 꺼내보지도 못하기 등등... 그런 일을 당한 날은, 퇴근하는 길 차 안에서 혼자 어찌나 연습을 했던지... 아까 왜 이렇게 받아쳐주지 못했을까. 왜 아까는 멀뚱멀뚱 당황만 하다가 다 끝나고 이제서야 차 안에서 바보 같은 짓인 거야!!! 왜 아까는 이 말이 생각이 안 난 거야!!! 등등의 바보 같은 한탄.

그렇게 거쳐온 훈련의 결과로, 오늘날의 나는 나아졌다. 잘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나아졌을 뿐. 그치만 그 나아지는 과정이 결과로 내 눈에 보일 때 나는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사한다. 잘했구먼. 담번에는 더 잘하겠구먼.  

해더는 그 즉시 달라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해더랑 또 팀이 되었을 때 그날의 해더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말투도 눈빛도. 내게 말도 무지 많이 걸었다. 환자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환자에 대해 컴플레인을 하기도 하고 더 필요한 일은 없는지 물어보기까지 한다. 흠... 아주 좋아. 이제부턴 일이 더 편해지겠고만... 니가 태도를 바꾸겠다면 나도 기꺼이 받아 줘야지. 환자에 대해 컴플레인을 하면 맞장구를 쳐주고, 환자에 대해 궁금해하면 환자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훑어주었다. 한 번은 자기는 phlebotomist 이기도 하니 바쁘면 환자 blood sample도 대신해 주겠다고 한다. 오 마이갓~ 부탁도 안 한 일에 갑자기 왜 이런 거얏!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달라져서 놀라도 너무 놀랐지만, 웃으며 자연스럽게 어 정말?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Confrontation. 정말 자신 없는 것. 넘나 불편한 것. 하지만 그 결과로 나는 더 이상의 불필요한 충돌을 제거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거나 사담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럴 마음도 없다. 하지만 해더와 팀이 되었을 때의 불편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쓸데없는 일에 기분 상할 일 따위는 없어졌다. 사실 해더가 내 스토니 브룩 생활의 유일한 불편함이었으므로.

내 성격도 변했다. 이런 따위의 일들을 경험하고 혼자 해결해 나가며 생각도 태도도 달라졌다. 나는 예전보다는 단단해진 것 같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국이 내게 온실이었다면, 나는 온실보다는 쌀쌀한 환경에 노출되어서, 이곳에서 살아남는 기술들을 조금은 획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초등 때 버릇 서른, 마흔까지 간 나는 여전히 좀 그러하다. 여전히 웃는 얼굴. 게다가 이제는 어떤 '사회적 미소' 같은 것도 장착되었달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아이유에게 그랬다. "인간이 인간에게 서로 잘해주는 건 기본 아냐?" 이런 공감 백 퍼센트스러운 대사라니... 해더 같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나도 가끔은 기분이 태도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집안의 막내딸, 겁이 나면 숨는 것조차도 못해서 울기부터 했던 아이. 어릴 적 어떤 친구 엄마들은 "아이고 우리 맨날 웃는 친구 또 왔네~" 했었다. 그 웃는 얼굴로는 해야 할 말도 잘 못해서 쭈뼛거리고 했던 순진한 나는, 이제 풍채 좋고 목소리 괄괄한 미국 아줌마 들과도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갈 길이 멀지만 조금씩 가는 중. 나는 나여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조금씩 배워가는 중.